디지타임즈(DGTIMEZ) 이기훈 |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지식의 홍수에 살고 있다.
예전에는 전문가들만이 공부하여 알아낸 지식들도 몇 번의 클릭으로 알 수 있다. 심지어 질문만 해도 답을 알려주는 ChatGPT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식 영역을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우리들은 지식의 내용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사실인지 아닌지, 무엇이 더 효율적인지, 어떤 상품이 가성비가 좋은지를 이러한 정보들을 기반으로 판단하고 그렇게 획득한 지식에 기초하여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렇게 획득한 지식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라는 의문도 품을 수밖에 없다.
더 직설적으로는 “우리 부모님 세대보다는 우리는 더 행복한가?”, “그런데 왜 정신과는 더 많아지고, 자살률은 더 높아지고, 우울증은 감기처럼 우리 곁에 있는 것일까?”
그렇게 최종적으로는 “지식은 우리의 삶을 더 충만하게 느끼게 하는가?”
필자의 스승이자 숲 철학자 김용규 선생님은 ‘무자천서(無字天書)’를 이야기하였다.
즉 ‘글자 없는 하늘의 글’ 바로 숲이다. 숲과 숲 안에 사는 생명들이 보여주는 놀라움은 단순히 산림학이라는 지식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과학에서 감탄과 경이를 제거하는 것은 과학을 죽이는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0세기 이후 최고의 과학자가 과학을 통한 지식 너머의 감탄과 경이를 만나지 못하면, 과학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위의 관점은 동아시아 철학인 성리학은 리(理)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理는 불사연이연(不使然而然) 한 것이다. 즉 ‘누가 그러라고 시키지 않았는데 그리 되는 것’을 말한다. 싹 틔우라고, 봄이 오라고, 인위적으로 시키지 않지만 다 그리되는 자연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자연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을 우리는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을 생각해 볼 때 지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 너머에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꽃을 함부로 밟지 못하고, 그 감탄의 느낌을 간직하고자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성의 지식 너머를 알지 못한 채 지식의 판단에만 매몰될 때 우리 삶은 풍성하기보다는 메말라 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시린 봄 냉이를 만났을 때 냉잇국을 끓이는 재료로만 생각한다면 냉이라는 생명은 우리에게 맛과 영양분의 수단으로만 쓰이지만, 냉이가 견뎌내었을 겨울한파를 생각한다면 애잔함과 대견함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힘들고, 아플 때 그 이유가 환경과 타인 때문이라고 여긴다면, 환경과 타인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지속 괴로울 수밖에 없고, 이러한 괴로움은 우리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지만, 그 속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살필 수 있다면 힘듦과 아픔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삶을 좀 더 풍성하고 충만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자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그 첫째가 포착하는 눈(타 감각 포함)이다. 냉이에게서 애잔함과 대견함을 포착하는 눈을 가진 사람은 뺨을 스치는 바람에서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제껏 알고 있는 지식에 매몰되어 당연하다고 여기면 넘기는 것들을 만날 때 잠시 멈추어보자. 그리고 좀 오래 동안 지켜보고 느껴보자. 아직 만나지 못한 비어있던 삶의 영역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알아차림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 생각에 포획당하지 않을 수 있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전부라고 여긴다면, 그 감정과 생각이 만들어 둔 웅덩이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일어난 생각을 멈추어 살펴보자. 정말 나의 생각인지 긴 호흡을 하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지면을 통해 필자는 우리가 삶에서 놓치고 있을지 모르는 이야기를 포착과 알아차림을 기반으로 하여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필자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필자의 견해를 만나보는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 이 칼럼이 존재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